여기는 ARPA-H |

1명의 아이가 만들 기적과 미래 프로젝트 'HEART'
희귀질환 한 명 치료 성공하면 더많은 환자 길 열려

우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기업은 뛰어들 수 없는 분야가 있다. 수익성이 불분명하고, 기회비용이 너무 큰 분야가 그렇다. 한국형 ARPA-H는 이 틈새를 메울 '청사진'(Blueprint)을 제시하기 위해 탄생했다. <히트뉴스>는 우리 보건의료환경을 바꿀 ARPA-H의 프로젝트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그 가치를 재조명하려 한다.

"희귀질환, 누군가는 도전해야 길이 열립니다"

2016년 6살이었던 밀라 마코벡은 갑자기 걷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하루 30번 이상 발작이 일어났다. 진단명은 바텐병(Batten disease). 뇌에 지방 색소가 쌓여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희귀질환이었다. 엄마인 줄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딸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들고 보스턴 어린이병원의 티모시 유 박사를 찾아갔다.

유 박사는 밀라에게만 있는 독특한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다. 한 명을 위한 치료제 개발의 시작이었다. 10개월 간의 작업 끝에 만들어진 것은 아이의 이름이 붙여진 '밀라센'. FDA는 이를 긴급 승인했다.

밀라는 2021년 1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투여 3개월 이후 하루 30번이 넘던 발작은 3~4번으로 줄었다. 가누지 못한 몸을 일으키기도 했다.

2019년 '뉴잉글랜드 메디신'에 실린 이 이야기는 세상을 바꿨다. FDA는 밀라센의 경험으로 N-of-1 치료제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이후 밀라의 가족들은 재단을 만들어 희귀질환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지금 국내에서도 첫 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진행 중인 한국형 ARPA-H 사업 내 유전성 소아 희귀질환 치료제 및 환자 맞춤형 플랫폼 'HEART' 프로젝트다.

유전성 소아 희귀질환은 매년 약 4000명 이상 발병한다. 국내 환자는 약 80만명이며 80%가 유전성이다. 치료시기를 놓쳐 5세 이전에 사망하는 환우가 30%에 달하지만 문제는 치료제가 없다는 데 있다. 95%가 치료제가 없다. 임상데이터 제한, 시장성과 경제성으로 기업도 개발을 망설인다.

실제 지난해 기준 희귀의약품으로 허가받은 39개 의약품 중 32개가 수입의약품일 정도로 국외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적 차이로 인해 국내 환자가 사용할 수 없는 사례도 다수다.

박미선 PM이 이끄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N-of-1 즉 단 한 명만을 위한 임상시험이라는 데 있다. 치료제가 없고 사망률이 높은 치명적 희귀질환 중 유전적 원인이 밝혀진 소아 희귀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올해부터 오는 2029년까지 175억원의 예산으로 진행될 예정으로 △환자맞춤형 혁신치료 플랫폼 설계(1단계, 1년 6개월) △품질확보(CMC) 및 비임상시험, 임상시험계획승인(2단계, 2년) △임상시험 및 사업화 전략 수립(3단계, 1년) 등 3단계로 구성됐다.

언뜻 보면 일반적인 정부 과제의 형태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전' 형태를 띤다. 아이의 생명이 달린 만큼 쉴 틈 없이 각 단계가 맞물린다.

이 프로젝트의 구심점인 박미선 PM은 전 식품의약품안전처 첨단바이오융복합연구과장을 지낸 인물이다. 지난 5월 한국형 ARPA-H의 '미정복질환 극복' PM으로 임명되면서 HEART 프로젝트를 이끌게 됐다.

그가 희귀질환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PM으로 지원할 때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해서 제출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구상했던 것이 N-of-1 임상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희귀질환을 두 카테고리로 나눴다. 그 중 하나가 치명적이고 유전적 원인은 밝혀져 있지만 치료제가 없어 조기 사망할 수밖에 없는 소아 희귀질환이었다. 프로젝트 이름 'HEART(Hope for Every child through Advanced Rare disease Therapies)'에는 그의 철학이 담겼다.

"환자도 그렇고 의사도, 규제기관까지도 전부 다 한마음을 모아야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아이들에게 희귀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혁신적인 치료 플랫폼을 개발해서 희망을 줬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HEART'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3년을 기다리라고요?

한 엄마의 질문이 모두를 뛰게 했다

박미선 PM이 HEART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가장 가슴 깊이 새긴 순간은 희귀질환을 가진 아이의 어머니와 의사의 대화였다.

"이 환자는 우리가 하는 치료 플랫폼에 어느 정도 매칭이 될 것 같습니다. 샘플을 채취해서 세포를 만들고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의사의 말에서 치료제가 없었던 엄마는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3년 정도 걸릴 것이라는 말에 어머니는 대답했다. "3년을 기다리라고요?"

박 PM은 그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말이 제 마음에 확 꽂히면서 가슴이 철렁했어요. 이 엄마에게 3년을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든 거예요. 밀라도 조금 더 어릴 때, 조금 더 빨리 했으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병이 진행된 다음에 치료했잖아요. 우리는 그런 교훈이 있으니까, 꼭 4~5년까지 기다리지 말자. 환자마다 달라야 한다는 거죠."

이 경험은 HEART 프로젝트의 운영 철학을 완전히 바꿨다. 기존의 정형화된 R&D 평가 관리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반적으로는 마일스톤이 있어요. 이 단계를 완료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그런데 환자는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A라는 환자가 빨리 준비되면 빨리 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마일스톤 관리를 연구자, 규제기관, 환자, 의사가 함께 의논해서 조절하면서 가자고 했습니다. 실컷 다 준비했는데 환자에게 혹여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죠."

HEART 프로젝트는 2025년 7월 본격 시작됐다. 현재는 1단계(1.5년) 경쟁형 과제로 진행 중이며 서울대병원과 연세대학교 두 곳에서 수행하고 있다.

박 PM은 희귀질환을 직접 치료하는 의사들이 환자의 치료력과 상황을 알 수 있는 만큼 유전자 치료 플랫폼이 적합한가 아닌가, 과연 우리 기술로 치료할 만큼 그 변이가 가능한 것인가를 의사가 직접 판단하도록 했다.

이후 의사들에게 어떤 질환을 가지고 이 과제를 수행할 것인지를 제안하도록 해 평가를 거쳐 2개 과제를 선정했다. 연세대학교는 소아 뇌전증, 서울대학교는 신경계 질환과 근육 질환을 다루고 있다. 두 과제 모두 ASO(Antisense Oligonucleotide, 안티센스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 플랫폼을 사용한다.

"ASO가 합성도 가능하고, 타깃만 정확하게 맞으면 치료 효과도 빠르고, 이미 미국에서 밀라센 같은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적용이 빠르지 않을까 해서 우선 가능한 것부터 해보자고 했어요."

연구자들의 열정도 남다르다는 것이 박 PM의 말이다.

"의사 선생님들이 그러더라고요. 보통 국가과제를 따면 한 달 정도는 '우리 수고했어, 자축하고 숨 고르자'라고 한다고요. 이번에는 바로 착수 보고하고 월별로 계속 과제 진도를 점검합니다. 마일스톤 점검을 화상회의로 하면 끝나지 않아요. 연구자들끼리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면서 의논도 하고 진도 점검도 해요. 나중에는 6시에 저녁 예약이 됐다고 하는데도 7시가 다 돼서도 끝내지 못했어요. 연구자들이 진심으로 하고 있어요."

자신의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일념이 이들을 분주히 움직이게 하고 있는 만큼 현재 환자 샘플을 확보하고 유전체 분석을 진행하며 각 환자에게 맞는 방식이 무엇일지 검토하고 있다. 올해 환자가 선정되면 그 환자에게 딱 맞는 치료제를 만들기 시작한다.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그럼에도 환자 선별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환자의 질환 진행 상황에 따라 아이가 병을 버틸 수 있을지, 너무 어리면 증세가 나올지, 환자가 치료 방법에 맞지는 않는 것이 아닐지 등이 여전히 한계로 남는다.

희귀질환이 특히 어려운 이유는 환자마다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유전자 변이라 해도 환자마다 변이 양상도 다르고 위치가 달라 치료 방법도 달라진다. A라는 변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지 않은 B 변이 등의 가능성도 있다.

기술적 요소, 혁신 기술, 환자의 유전 정보, 진단 기술, 의사의 정확한 판단, 환자의 중증도와 치료력이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환자가 선별되는 만큼 PM도 연구자도 속도를 낼 수밖에는 없다.

박 PM은 HEART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 희귀질환 연구는 실험실 수준에서 재현을 확인하는 TRL 4 이하로 다 머물러 있어요. 예산도 너무 적고, 그래서 이 이상 넘어 가지를 못해요. 우리 나라는 유전자 진단도 훌륭하고, 혁신 기술도 좋아요. 유전자 편집도 되고, 전달 기술도 수준급이거든요. 그런데 희귀 환자한테 적용이 안 되는 거예요. 희귀라는 이유 때문이에요. 경제성도 없고, 환자마다 다양하고, 중증도도 다 다르니까요."

ARPA-H는 바로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존재한다.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기존 인프라를 이용해서 진짜 환자까지 일단 가보자. 모든 환자를 다 할 수는 없으니 일단 N-of-1으로 환자 맞춤형 플랫폼을 만들어서 성공하면 그 플랫폼이 또 다른 유전자 변이에 맞춰서 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앉아서 같이 고민하자

규제를 다뤄봤으니 '밸런스'도 맞춘다

식약처 출신인 박 PM은 규제와 혁신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한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제가 식약처 입장도 되어 봤기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심사를 하고 도와주려 하는지 알아요. 희귀 환자는 그렇지 않아도 약한데, 만약 맞지 않아 문제가 생기면 안 그래도 아픈 애인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안전성은 정말 보장돼야 합니다."

하지만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는 생명이 촌각에 달린 만큼 기관과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이어진다.

"규제기관 동료들하고도 계속 제가 만나면 '우리 이거 할 거야, 가이드라인 지금 없어, 우리 만들어야 돼'라고 얘기해요. 얼마 전에도 의약품 평가심사부에서 가이드라인 관련 회의를 한다길래 'N-of-1'의 필요성을 호소한 적도 있어요."

다행히 최근 수년간 규제 당국이 혁신 제품을 위한 신속심사나 GIFT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에는 식약처 출신 전문가들을 자문단으로 구성하고 각 연구팀에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하며, 시간을 놓치지 않으면서 환자에게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박미선 PM과 연구자들의 목표다.

 

한 명에게 국가 예산을 쓰고 다른 환자 위한 '희망' 그린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희귀질환 환자 몇 명을 위해 국가 예산을 들일 필요가 있느냐고.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한 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이를 살릴 기반을 만드는 기회이기도 하다.

"저는 국가는 민간 투자와 달리 돌봐 주는 것처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이게 딱 한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플랫폼 기반인 만큼 동작 여부를 확인하고 향후 다른 환자들한테도 적용할 수 있어요. 다른 환자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죠."

실제로 HEART 프로젝트 예산으로 모든 희귀질환을 커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의 마중물을 통해 사회적 관심도, 기업의 개발 가능성을 열 수 있는 만큼 이번 프로젝트가 그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박미선 PM의 목표는 확고하다. 수많은 경험을 거친 만큼 왜 희귀질환은 치료제가 없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투자도 어렵고, 도전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요. 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고...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죠." 그는 강조했다.

"이 과제는 그냥 일반적으로 연구비를 따서 논문을 내고 특허를 내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에요.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내 이웃의 누군가를 위한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해야 되는 거죠. 이보다 가슴이 뛰는 일은 없었어요.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키워드

#ARPA-H
저작권자 © 히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