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권, 제약사와 '양자 협상'
그러나 한국은 '건정심 보고' 이후 의결
25년간 10여차례 약가 인하, 그러나 민간 연구 1건
"설계 단계에서부터 협의채널 제도화 필요"

제약업계가 '11.28 정부 약가제도 개편안'을 두고 재검토와 함께 '상설 협의체' 마련을 요구했다. 약가인하 문제에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 과정에 산업계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없다는 문제 제기다. 특히 주요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약가 관련 거버넌스에 구조적 공백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22일 제약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약가제도 개편안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당초 부분 재검토를 비롯해 개편안 내 세부 논의 등이 오고 갔지만 완전한 재검토로 방향을 튼 셈이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를 공개하며 제네릭 산정비율이 현행 53.55%에서 40%로 인하될 경우 연간 최대 3조6000억원의 매출 손실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상위 100대 제약사의 평균 영업이익률이 4.8%에 불과한 상황에서 이 같은 인하는 기업의 이익 한계치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경고다. 고용유발계수를 적용하면 약 1만4800명의 대규모 고용 감축도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비대위는 이 같은 심각성 못지 않게 정책 결정 구조 자체를 크게 문제삼았다. 비대위는 이날 "1999년 실거래가제도 도입 이후 10여 차례 약가인하가 단행됐지만, 제도의 효과와 부작용, 산업 영향 등의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평가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향후 약가제도 수립 과정에서 산업 현장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해달라"며 상설 협의체 구성을 촉구했다. 실제 국내 제약업계에서 나왔던 새 약가 제도의 영향 평가가 없었다는 부분과 궤를 함께 한다.
현재 한국의 약가 정책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를 통해 심의·의결된다. 건정심은 가입자 대표 8명, 의약계 대표 8명, 공익대표 8명 등 총 25명으로 구성된다. 업계에서는 '의약계 8명'에 의사·병원 등 의료계와 약업계가 함께 묶여 있어 제약산업이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공익위원 역시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측면이 있어 실질적으로 정부안 관철에 유리한 구조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비대위가 제기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건정심의 역할 그 자체다. 정부가 개편안을 마련해 건정심에 '보고'하면 위원들이 심의·의결하는 구조인데 제약사가 정부와 마주 앉아 가격을 협상하는 테이블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안건을 검토하고 의결하는 자리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산업계 입장에서는 정책 설계 단계에 참여할 공식 채널이 없는 셈이다.
특히 이번 약가제도 개편안 역시 어느 정도 틀이 굳은 상황에서 제약업계와의 논의가 아닌 '협의'의 형태로 진행됐다는 것이 업계 내부 관계자의 말이기도 하다.
한국 vs 해외 약가 결정 구조
일단은 테이블에 앉고 보자
외국 약가 거버넌스는 '쌍방 논의'
해외 여러 나라의 경우 약가 결정 체계는 사뭇 다르다. 유럽권을 보면 독일은 지난 2011년 도입한 의약품시장재편법(AMNOG) 체계를 운영한다. 신약이 출시되면 연방공동위원회(G-BA)가 기존 치료제 대비 추가적인 편익을 평가한다.
이후 제약사는 법정건강보험연합회(GKV-SV)와 직접 가격 협상을 진행하는데, 양측이 합의에 실패하면 중재위원회가 최종 가격을 결정한다. 물론 이 역시 협상 결렬 이후에는 정부에게 힘이 돌아가는 구조이긴 하지만 제약사가 협상 테이블의 당사자로 참여한다.
정부가 약가개편의 근거 중 하나로 삼았던 프랑스도 약가 거버넌스에서는 국내와 차이를 보인다. 투명성위원회(CT)가 신약의 의료적 편익을 평가하면, 보건제품경제위원회(CEPS)가 제약사와 5년 단위 계약을 협상한다. 가격뿐 아니라 예상 판매량까지 합의하는 포괄적 계약 구조다.
영국은 국립보건임상연구원(NICE)의 비용효과성 평가를 거친 뒤 영국제약산업협회(ABPI)와 정부가 5년 단위 자발적 약가협약(VPAG)을 체결한다.
세 나라 모두 공통점이 있다. ① 평가 기관과 가격 협상 주체가 분리돼 있고 ② 제약산업 대표가 정부나 보험자와 직접 협상하는 공식 채널이다. ③ 정기적인 프레임워크 협정으로 산업계에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특징이다.
반면 한국은 1999년 실거래가제 도입 이후 누적 약 63조원 규모의 약가인하를 단행했지만 정책 효과의 본격 실증 연구는 25년만인 2024년에야 나온 것이 사실이다. 정부 차원에서의 정확한 수준의 영향 평가는 사실상 이뤄진 적이 없다.
2024년 최윤정 연세대 교수 연구진의 보고서를 보면 2012년 일괄 약가인하 이후 제약사들은 비급여 의약품 생산 비중을 31.5% 늘렸다. 건보 재정은 일부 절감됐지만 소비자 약제비 부담은 오히려 13.8% 증가했다. 연구 보고서에서는 "정책 설계 시 소비자와 건보재정뿐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제언이 담겨 있다.

비대위가 요구하는 '민·관 합동 약가정책 상설 협의체'는 바로 이 구조적 공백을 메우자는 것이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안을 만들어 건정심에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정책 설계 단계부터 산업계와 협의하는 채널을 제도화하자는 취지다.
비대위 역시 기자회견에서 "개편안 시행을 일정 기간 유예하고, 기존 약가 정책이 국민건강과 산업에 미친 영향을 면밀히 분석한 뒤 합리적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하고 있다. 실제 비대위가 기자회견을 연 이유 역시 정부의 추진 의지가 너무 강한 만큼 이에 대응하기 위해 업계 내부에서 강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비대위는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 향후 알리는 한편 2월 건정심이 열리기 전까지 협의를 진행하고 이를 전면 재검토하는 '협상 테이블'을 요구하고 있는 만큼 이해당사자 간 논의의 자리가 이어질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