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 때문에 해외제품 쓰냐고 현장에 물었더니
제약바이오 생산장비에는 'K' 바람이 거의 없다

"이게 미국에서 새로 들어온 장비인데요."

"이건 유럽에서 들고 오느라 꽤 고생했어요."

의약품 제조 현장을 취재할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장비 앞에 서면 해외 브랜드 이름이 먼저 나온다. 제조장비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무용담'도 이어진다. 국산 장비는 그들에게 자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업계 관계자, 보고서, 현장 경험 등을 바탕으로 국내 바이오의약품 생산장비 업체의 열악함과 노력, 향후 국가 차원의 지원 필요성을 짚어본다. 

[끝까지 HIT 14호] 몇 해 전 만났던 한 국내 제약사 생산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공장에 국산 장비 비중이 얼마나 되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말했다. "사실 저희 쪽에 국산 장비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컨베이어나 일부 보조 설비는 국산을 쓰지만, 고가 장비는 상당수 해외 제품입니다."

왜 그런지 물었다. "한 번 사면 오래 써야 하니까 품질이 검증된 걸 고릅니다. 기준에 맞는 것도 있고요. 정말 품질 때문이냐고 재차 묻자, 그는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다만 국내 제품보다 최근 규제를 잘 반영하고 있는 해외 제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만약 예산이 충분하다면 무엇을 고르겠냐고 더 몰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해외 제품으로 다 세팅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주요 제약사 현장에서는 생산설비의 신뢰성과 규제 기준 충족 여부가 장비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꼽힌다. 특히 바이오 의약품 생산라인의 경우, 한 번 설치한 장비를 10년 이상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초기 도입 단계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 장비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해외서 국산 점유율은 고작 0.6%

숫자가 말하는 현실

포털에서 '국내 의약품 생산장비 비중', '한국산 의약품 생산 장비' 등을 검색해 봤지만, 구체적 수치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검색 사이트와 10여 분 씨름한 끝에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의 '바이오의약품 제조품질 관련 기술시장 동향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찾았다. 보고서에는 바이오의약품 공정에 필요한 장비들이 나열돼 있었다. 바이오리액터, 세포배양 스토리지, 셀 카운터, 인큐베이터, 원심분리기, 정제 크로마토그래피, 여과시스템, 동결건조장비, 현미경, 멸균기 등이다.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정부도 국산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실제 주요 제조장비 특허의 75%는 싸이티바, 써모피셔, GE헬스케어 등 글로벌 업체가 쥐고 있다. 특히 국내 기업은 특허 장벽에 막혀 주요 장비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 한국기계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보고서를 찾아냈다. 더 심각했다. 글로벌 바이오의약품 생산장비 시장은 2022년 527억 달러에서 2028년 100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2022년 기준 국내 바이오 장비 시장 규모는 3억 달러에 불과했다. 반올림해도 세계 시장 규모의 0.6%뿐이다.

격차가 너무 벌어지다 보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른바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중 상대적으로 개발이 용이했던 소재 및 부품과 비교해 그 실정이 더 열악했다. 특히 바이오리액터, 정제·여과 시스템 등 핵심 공정 장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의약품 생산장비 기업 중 다수는 지역사무소 등이 없는 단독 사업체다. 공장이나 연구소, 지점이 없는 영세 구조다. 이로 인해 신제품 개발, 품질 인증, 글로벌 마케팅 등의 역량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CDMO(위탁개발생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 대형 기업은 물론 기존 제약사까지 생산 능력 확장에 나서고 있지만 이들도 핵심 설비는 해외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다. 국산화에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 없는 현실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업계에서는 바이오장비 산업은 까다로운 성능을 요구하는 만큼 새로운 도전에 극도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또 다른 제약사의 생산담당 임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해외 기준이 높아지고 있어요. 기계는 한 번 사면 오래 써야 하니, 감염 우려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기준에 맞는 기계를 사야 합니다. 생산 공정에 맞춘 해외 제품을 어쩔 수 없이 들여와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장비가 없다"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

제품 수요와 공급 불균형도 큰 문제였다. 기계연이 조사한 72개 수요기업, 35개 공급기업의 설문 결과를 보면 2021년 기준 '사용 중인 장비 없음'과 '판매 중인 장비 없음'의 격차가 최대 70%에 달하는 것으로 나온다. 국내 기업이 만들지 않는 장비는 결국 해외에서 직접 구매해야 한다. 주사제나 점안제 등을 비롯한 특수 제형 제품 중 국내 제조사가 없어 해외에서의 기준에 맞는 제품을 들여와야 한다는 속사정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분석, 기반 장비 분야에서 격차가 두드러졌다. 2022년 기준 국내 바이오장비 기업은 55개, 종업원은 1876명에 불과하다. 이 중 대부분은 50명 미만의 소기업이다. 같은 기간 연구개발비는 227억원, 한 기업당 4억 200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의약품 분야의 대표적 연구개발 기업인 한미약품의 연구비는 1779억원으로, 8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 기업을 탓할 수 없다. 기업 수를 기반으로 매출 대비 연구비를 나눠보면 한 기업당 연구비는 11% 수준에 달한다. 제약기업 중 10%도 안 쓰는 회사는 널려 있다.

특허 장벽 역시 국산화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다. 글로벌 장비업체들은 단일 특허로 다양한 제품군을 포괄한다. 국내 기업이 유사 제품을 개발해도 특허 분쟁에 휘말릴 위험이 크다. 규모가 작은 기업 입장에서는 소모성 부품이나 단순 기기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식약처 등 규제기관의 GMP(우수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 요건이 강화되면서, 장비의 성능·신뢰성·추적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점도 국산 장비 도입을 어렵게 만든다.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도 인지도를 갖춘 회사는 많지 않다.

제조 과정에서 데이터 무결성(DI)을 위한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업체 전직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외국 제품을 갖춰놔야 규제기관들이 더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사용 경험을 충분히 갖춘 국산 제품'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박람회 취재 중 만났던 검사기계 업체 관계자에게 전화했다.

나름 기술력과 업력을 갖춘 회사였지만 "코로나 때는 해외 제품 구하기 어려워서 그랬던 것 같은데, 확실히 지난해부터 구매를 타진하는 분들이 줄어 들었다"고 말했다.

 

이미 늦었지만... 그럼에도 지금이 골든타임

정부가 추진하는 여러 사업을 찾아봤다. 정부는 코로나19 이후 '바이오 의약품 소모성 부품장비 개발 사업 등 국산화 노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특허, 기술, 자본의 삼중고를 넘어서기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극단적 가정이지만 미국이나 유럽, 일본이 내일 당장 수출을 중단한다면 국내 제약공장은 멈출 수밖에 없다. 업계는 정부의 R&D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또 국산장비 인증제를 도입해 업계에 국산장비가 실질적으로 도입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동화, 스마트공장 등 미래 기술 트렌드가 바이오 의약품 생산장비 산업에 미칠 파급력을 인지하고 지금이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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