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조달 시간(lead time) 짧고, 품질경쟁력 높은 건 강점
세제 혜택 등 유인책, 배치 사이즈 키우는 규제 완화 절실
공장은 많은데 글로벌 케미컬 CDMO는 없다
케미컬 완제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많고, 어느 기업 못지 않게 높은 품질의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이 높다는 자화자찬이 쏟아지는데 정작 내세울만한 글로벌 CDMO 한곳이 없는 것은 아이러니다. 우리는 안되나, 못하나.
① 내수적 마인드, 생각도 안해 본 글로벌 CDMO
② 그들에게도 처음은 있었다-테바와 썬파마
③ 우리는 어떻게 글로벌 가격을 맞출 수 있나
④ 번외편, 대한민국 CDMO 현실
"Post-genome 시대에 인류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바이오 사업 전개 필요. 그룹의 바이오 사업 전개 계획과 연계해 신사업 창출 추구해 21세기 도래할 바이오 사회의 시장 주도업체로의 입지 확보"
"세계 바이오 시장의 규모는 2000년 540억달러에서 2013년 2100억 달러로 증가(연평균 11%)할 것으로 예상"
"그룹 사업과의 연관성, 특허 확보 가능성, 투자 비용 등을 고려해 치료용 단백질 사업(동물세포 배양), 바이오 소재 사업, 바이오의약품 사업(항암제 개발) 등 추진"
삼성 바이오사업팀 사업계획서 발췌 (2000년 7월 14일)
[끝까지HIT 7호] 2000년 삼성 바이오사업팀 사업계획서로부터 바이오 불모지였던 한국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소했던 바이오의약품은 20년 만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먹거리 사업으로 성장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인천 송도가 바이오의약품의 성지가 될 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이라고 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글로벌 강자로 거듭났다.
반면, 우리나라의 합성의약품(케미컬의약품) 생산 역사는 짧지 않다. 1897년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활명수', 1927년 유한양행의 '안티프라민'을 기점으로 많은 제약사들이 생기기 시작됐고, 자사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제품들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개념의 '합성의약품'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로 볼 수 있다. 1977년 'KGMP(우수 의약품 제조 관리 기준)'이 도입돼 자율적으로 제약사가 GMP를 실시하도록 권고됐고, 1992년 '우수 의약품 제조 및 품질 관리 기준'을 거쳐 1994년을 기점으로 현재의 'GMP(의약품 제조 및 품질 관리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1999년 SK케미칼이 개발한 국산신약 1호 '선플라(성분 헵타플라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36개의 신약이 허가됐다.

합성의약품의 기초는 잘 닦여 있는 상황이다. 다양한 제형을 생산할 수 있는 수탁사들(CMO)이 즐비하고, 자체적으로 공정 개발까지 수행할 수 있는 제약사들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이들은 GMP를 유지하며, 국내 기업들에 고품질의 내수용 의약품들을 공급하고 있다.
이런 수십 년의 의약품 개발 역사에도, 국내 합성의약품의 개발과 생산은 CMO(의약품 위탁생산) 및 CDMO(의약품 위탁개발생산) 기업을 중심으로 한 내수용 후발약(제네릭)과 일반의약품 등의 위·수탁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 4월 공개한 '2022년 의약품 허가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허가·신고돼 있는 의약품 1451개 품목 중 완제 합성의약품은 1345개 품목(92.7%)으로 나타났다. 또 완제 합성의약품 중 신약, 희귀의약품, 자료제출의약품 등을 제외한 제네릭, 표준제조기준, 안유(안전성·유효성) 면제, 한약서 수재 유형의 의약품은 897개(55.4%) 품목으로 나타났다.

또 완제의약품 중 전문의약품이 1097개 품목(75.6%), 일반의약품이 354개(24.4%)인 점을 미뤄볼 때, 건강보험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네릭 전문의약품이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준제조기준, 안유 면제, 한약서 수재 유형 품목들은 대부분 일반의약품이기 때문이다. 시장성이 있는 신약의 특허가 만료되는 순간, 무수히 많은 업체들이 제네릭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현 상황이 잘 반영돼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국내 제네릭 시장은 포화 상태다. 국내 대부분의 제약회사가 제네릭 CMO 위주의 합성의약품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정한 시장 내에서 다수의 회사들이 파이를 나눠 먹는 구조인데, 그 파이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의약품 CMO 사업을 통해 영위할 수 있는 영역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의약품 시장 규모는 2021년 기준 세계 13위로, 인접해 있는 중국(2위), 일본(3위)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즉, 아직 포화된 국내 시장의 한계를 뚫을 해외 고객 유치라는 또 다른 열쇠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왜 국내 제약사들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처럼 새로운 개척지인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CDMO 사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을까. <끝까지 HIT>는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그 이유를 들어봤다.
외국처럼 대량 생산을 위해선 배치(Batch) 사이즈 키워야
생산설비 등 대규모 투자 때문에 글로벌 진출은 아예 외면

CMO를 거쳐 CDMO로 이행하고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달리 글로벌 합성의약품 CDMO를 시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가격 경쟁력'이 꼽혔다. 아무리 의약품의 품질이 좋다고 하더라고, 시장 원리상 가격 경쟁력이 없는 제품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의뢰를 맡겨줄 업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위탁사에서 요구한 가격에 맞춘다고 해도, 내수용 제품을 생산해 공급하는 것에 비해 글로벌 시장 진출은 불확실성 대비 마진이 크지 않다는 게 맹점이다.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한 조건은 다양하다. 한 중견 제약사 공장장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량 생산', '설비 자동화', '인건비 절감', '합리적인 원료 가격' 등을 만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며 "우리나라는 이 요소들을 만족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생산 단위인 배치(Batch) 사이즈를 증대시켜야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우리나라 품목 허가 규정상 수탁사로 위탁 생산 의뢰가 들어온 품목은 모두 다른 품목으로 관리하도록 하고 있어, 이를 나눠서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외국의 경우 대형 배치를 통해 한 번에 대량 생산한 후 낱알 식별 및 포장만을 제품별로 할 수 있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만약 10개의 위탁 제품을 생산하는 수탁사의 경우 각 제품을 각각 배치를 구분해 10번에 걸쳐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약품 다품종 소량 생산 위주의 국내 위·수탁 환경에서 이런 '규모의 공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 배치 사이즈가 커지게 되면 인력 증가와 원료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다른 제약사 공장장은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인도에 비해 원료와 인건비 수준이 높은 편"이라며 "대형 배치 및 자동화 설비 등 대량 생산을 위한 설비를 갖추기에는 수출 품목에 대한 해외에서 가격 경쟁력이 문제가 되고, 설비를 갖추려고 해도 수출까지 확실하게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물론 바이오 CDMO 분야 또한 이같은 상황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에 성장해 선제적으로 기반을 마련한 회사가 없다는 점이 오히려 기회가 됐다.
이 공장장은 "바이오의약품 생산 설비 역시 상당한 투자 비용이 필요한 만큼, 개발 과제만 가지고 있는 경우 설비 투자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점은 동일하다"면서도 "기존에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을 갖춘 기업 수가 많지 않아 이미 설비를 갖춘 바이오 기업들이 비교적 CDMO 사업에 진입하기 쉬웠다"고 설명했다.
이미 대형 설비를 마련해 글로벌 합성의약품 CDMO 기반을 갖춘 회사들이 많은 만큼, 내수용 품목 생산에 익숙해져 있는 국내 제약사들이 뛰어들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국내 중소·중견급 제약사들은 해외 규제기관의 GMP 인증 절차에 익숙하지 않다. GMP 인증을 위한 실사에 대응하기 위해선 상당한 인력과 비용 및 시간이 드는 만큼, 각 부담을 얼마나 최소화하면서 이를 준비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아울러 신약의 경우, 수출시 수입국에서 개발국의 약가를 참조해 약가를 결정하는데, 우리나라는 수출 약가에 대한 고려 없이 약가가 결정돼 수출시 이익이 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도 애로사항 중 하나다.

이런 한계점을 호소하고 있지만, 사실 국내 합성의약품 CMO 기업들은 그동안 일명 '알바 CMO'라는 오명을 받아왔다. 전문 CMO로서 역할이 아닌, 자사 생산시설의 캐파(생산량·Capacity)의 여유가 생겼을 때만 일부 소품목 타사 제품을 수탁 생산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CMO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일견 수긍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합성의약품 CMO 기업들이 가지는 장점도 존재한다는 것이 공장 관계자들의 입장이다. 이들은 국내 합성의약품 제조 제약사들의 개발 및 조달 시간(lead time)이 짧고, 품질경쟁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꼽았다. 그러면서 이런 장점들을 기반으로, 글로벌 합성의약품 CDMO 기업이 생성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도 제시했다.
먼저 외국의 사례처럼 동일 제품의 경우 위탁업체가 다르더라도 하나의 제조단위에서 포장만 다르게 공급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규모의 공장'에 투자를 시도하는 업체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생산량 증대를 위한 공장 부지 및 자동화 설비 등을 위한 투자금에 대한 세제 혜택, 수출 품목에 대한 세제 혜택, 합리적 약가 정책 등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GMP 인증을 포함한 규제기관의 컨설팅 지원도 마찬가지다.
제약사 품질 업무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K-합성의약품 CDMO 출범을 위한 성공의 조건으로 "경제 논리에 따라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며 "세제 혜택 등 유인책이 필요하며, 배치 사이즈를 증대할 수 있도록 현재의 인허가 규제의 허들을 낮춰준다면 성공 가능성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